12월 8일
드디어 "The Way to the Heaven" 전도 책자를 버마말과 샨언어로 번역, 출판을 완료했다. 1차 여행 때 만난 Breck 선교사가, 이 두 언어에 능통하고 미얀마 신학 교수와 목회자에게 부탁해 번역을 맡기고 본인이 감수를 하여 파일을 우리에게 넘겼는데 열리지 않아 한국에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아 집사람이 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항상 거래하는 출판사에 넘기고, 이것을 알려서 싱가폴의 Rev, Charles Tan 에게서 2500불, 계림 교회에서 3000불을 헌금 받아 버마어 책자 만권, 산언어 책자 만권, 영어판 이천권을 출판하여, 이중 세 박스 (400권 ×3)를 들고 처음으로 양곤으로 가는 날이다. 프놈펜 공항에서 무게가 오버되어 35불 overcharge를 물고 양곤 공항에 도착하니 Breck 선교사가 나와있었다. Breck 선교사는 미국인으로 이십대 중반에 미얀마선교사로 나와 현지어를 익히고 버마말과 사역지인 샨 지방 말을 유창히 했다.
12월 9일
아침에 예배를 드린후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다음날 아침 5시30분에 땅쥐에 도착했다. 어떤 때는 편한 버스를 타면 수월한데, 잘못타면 12시간동안 고생하며 가야 한다. 고속도로가 아주 넓게 닦여있고 콘크리트로 된 도로이다. 전에 묵었던 NAMT KHONE HOTEL에 체크인 했다. 아침먹고, 한숨자고, 이른 저녁을 먹었다.
12월 11일
땅쥐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싼뿌죠"로 가서 그곳을 둘러보았다. 많은 공장 건물이 있었고 중소 기업단지인듯 했다. 안에 시설들은 별로 없었고, 군부독재를 하면서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아. 수준이 형편없었다. 거의 죽어가는 생산단지였고 활력을 찾아볼수없었다. 우리나라는 군부독재를 하면서도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위민청책을 실행하였는데, 미얀마는 그저 농업에만 의종하고, 농업도 기술 개발없이 구식의 형태로 낙후되어 있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불교에다 융통성 없고 미련하고, 악한 군부세력들이 자기배만 불리고 군대로 국민들이 일어나는 것을 억누르고 과학, 기술, 창의력, 자유, 진보, 자유경쟁, 해외진출, 건설적 비판 이러한 모든 것에 탄압을 가하다보니 50년 허송 세월하고 동남아의 불쌍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내 나이 또래의 미얀마인을 만나 이야기 해보면 그 사람들도 통탄을 한다. 어쩌다가 미얀마가 이렇게 추락하게 되었는지 다른 나라도 자기네 처럼 못살면 이해를 하겠는데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모든 우수한 제품이 생산되고 선진국 대열로 가는데하면서 군부가 나라를 망쳐놓았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군부 이전에는 농사도 잘되고 살기 좋았는데 군부가 들어오고는 농사도 잘 안되고 하면서 이 한국인을 보니 더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한가지 좋은 것은 예의와 예절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사람의 정이 따뜻하다.
12월 12일
베낭을 매고 땅쥐대학을 찾아 길을 나섰다. 1차 여행 때 Salai Oukar에게 영어 성경책을 한 권 줬는데 그가 땅쥐대학교 지리과에 다닌다고 해서 그를 한번 찾아볼 생각이었다. 교통순경을만나 불어보니, 나보고 잠깐 서있으라고 했다 차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호각을 불어대고 차를 세우고 보행자를 가게하고, 그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갔다. 겨우 정류장을 찾아 old fashion bus 를 타고 땅쥐대학 정문에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다운 건물없이 초라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리과 사무실에 들어가 그 청년의 사진을 보여주고 찾을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그때부터 소동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교수들이 다 모이고 그 사진을 보며 아느냐고 서로 묻기 시작했다. 영어가 잘통하지 않자 영어할 줄이는 사람을 찾으러다니다가 어떤 교수 아들이 영어할 줄 안다하여 그 아들이 오고 그 아들이 그청년이 Chin 침례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 침례교회 담임목사가 와서 나를 모토 뒤에 태워 그 청년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리과 교수들과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내가 Christian 인것과 70년도 버마와 한국이 축구시합에 라이벌이었던 것, 버마인 출신의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땅쥐대학도 한국대학과 교류해서, 여러학과도 신설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또 chin 침례교 목사도 다른 전도사를 소개해주어 Inlay 호수 부근의 지역을 자세히 볼수 있게 해주었다. 땅쥐대 교수들과 사진을 한번 찍자고 하니 학교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해 놀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찾던 그 청년 Oukar는 땅쥐대학에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Muse Hotel 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 일로 나는 인레 호수 부근을 상세히 볼수있는 전도자 philip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12월 13일
아침 4시쯤 잠을 깼다. 어제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땅쥐 대학에서 또 Chin 교회목사가 대접하는 것을 모두 마셨다. 밤새 속이 불편했고 방안이 추워 잠을 제대로 못잤다. 딸랑 딸랑 소리가 들려보니 소년 중이 종을 치며 가고 곧이어 어른 중들 열댓 명이 일렬로 지나가고 어떤 아줌마는 연신 한사람씩 밥을 퍼준다. 오늘 "냐옹쉬웨"에서 9시에 필립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7시가 되기 전에 호텔을 나가 시장에서 트럭버스를 타는 곳으로 갔는데 사람이 차지않아 8시반이 넘어서야 트럭이 출발해서 냐옹쉬웨에 도착하니 9시반이 넘었다. 필립은 없었다. 냐옹쉬웨 침례교회로 가서 물어보려고 그리로 걸어갔다. 날이 춥고 몸에 열이나고 불편했다. 교회에 도착하니 청년 둘이 있어서 그 친구들에게 필립한테 전화해서 교회에서 만나자고해서 그가 왔다. 그와 선착장에 가서 배 한대를 빌려 인레호수에 있는 Gay Lar 마을로 갔다. 거기에 한 가정교회를 방문했는데 집주인은 자녀가 12명(딸 9 아들3)이었고 식구들이 다같이 사는듯 했다 65년전 지은 집인데 아직 튼튼했고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집에서 살았고 본인도 이집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잡은 물고기를 튀겨서 먹고 이웃집을 배를 타고 방문했다. 이곳은 인레 호수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얕은 곳에 나무기둥을 세워 집을 짓는데 티크나무로 짓는다. 그 집에 들어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심판에 대해, 예수를 믿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냐옹쉬웨에 돌아오니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필립 집에도 들러 그 집 아이들도 만났다. 필립은 친족으로 양곤에서 신학을 하고 자녀가 5명이고 또 다른 아이들 7명도 같이 집에 산다. 인레호수 주변 산간지방에는 학교도 없고해서 이 선착장 부근은 마을이 크고 학교도 있고 해서 교육을 시키려 보내고 싶어도 기숙할 방이 마땅치 않고 하숙비도 비싸 이 집에서 편의를 봐주고 있다. 인레 지역에서 8년째 사역해오고 있다고 했다. 오늘 일을 생각하면 참 기이하다. 땅쥐대학에 가서 지리과 교수가 회의하듯 다 집합해서 모르는 외국인이 찾는 그 사람을 찾아주려고 온 성의를 다 보이고 마침내는 침례교 목회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 필립을 만나게 되고 필립의 사역지인 인레 호수와 마을을 둘러보고 번역된 전도지를 나눠주고 또 앞으로는 필립이 요긴하게 사용할 전도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사역이 나에게 생긴것을 생각하면 정말 묘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또 한번 경험했다. 실제로 이후에 계속된 전도여행에서 나 혹은 우리 팀은 이 전도지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와 샨지방, 특히 필립 전도자에게 공급하였다. 이곳은 산이 많은 지역이고 사역자가 직접 들어가 사역하고 전도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이 충분한 전도지의 역할은 소중하다. 또 이 대학의 해프닝을 통하여 북한이 문이 열렸을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미얀마는 불교와 군부가 결합된 매우 경직된 나라이고 북한은 주체사상과 군부가 결합된 매우 경직된 나라이기에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비슷한 양상을 나타낼 수 있다.
12월 14일
그렇게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간밤에 잠을 잘 잤다.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 수돗물을 틀어도 더운물이 나오지 않는다.로비로 내려가니 "Hot Water, No" 라고 한다. 태양광, 보일러에 문제가 생겼다고 기다리라고 한다. 어제도 물이 차서 샤워를 못했는데 햇살이 따뜻하게 방안으로 들어온다. 튼튼한 나무 의자에 앉아 요한 2서를 묵상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말씀을 지키며 가장 고통스러운 길을 가는 사람, 가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가장 핍박받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정의를 현대 교회와는 완전히 다르게 내리고 있음을 본다. 정욕의 사랑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현대 교회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새롭게 정의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온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속이는자"라고 했다 육신을 입고는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변명하고 죄 가운데 생활하는 현대 교인들에게 우리도 예수그리스도 처럼 육체를 입었지만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벌써 우리 자신이 "속이는 자" 의 범주에 들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운물은 계속 나오지 않았다. 식사 후 인레호수에서 좀 떨어진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 공장으로 들어갔다 사탕수수를 기계로 짜서 솥에 넣고 불로 가열하여 끓이고 다음 탱크로 보내어 또 가열하고 다음 공정에서 또 가열하고 해서 마침내 백설탕이 나온다. 50kg 한포대에 30불에 판다고 한다. 그 곳을 담당하고 있는 "카인수"와 한참 이야기를 했다. 그는 군에서 23년간 복무하고 장교로 전역했는데 연금은 90,000K(한달에), 미화로 100불 조금 넘는 금액을 받고 있다고하며, 그렇게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했는데 연금이 너무 적다고 했다. 지금 장인이 하는 설탕 공장을 돕고 있는데 아들딸이 9살 6살인데 아침에 학교에 가서 저녁 9시나 되야 집에 온다고 했다. 교육열이 대단하다 자신은 시간이 많은데 아이들은 시간이 없다고 하고 한국에 대해 대단히 동경하고 있었으며 화학을 전공했고 카친족 출신이라했다. 또 그 집을 나와 걸어가니 초등학교가 있었다. 화장실(양철로 되어있는)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나올려하는데 화장실 문에 쿵하고 큰 소리가 난다. 누군가 화장실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이다. 조금만 일찍 화장실문을 열었으면 내가 맞을뻔했다. 이 외국인이 학교에 들어오니 누가 영웅 심리에서 돌을 던진 모양이다. 내가 정색을 하고 이리와라 하면서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학생들이 모두 도망간다. 그러더니 한 학생이 그 돌 던진 학생을 찾아오겠다며 가더니 한 학생이 울면서 계단을 내려온다. 그래도 아직까지 순진한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호텔로 돌아와 수돗물을 트니 뜨거운 물이 나왔다. 얼른 샤워를 했다. 오늘 하루 3시간 정도 걸었다.
12월 15일
새벽 2시쯤 잠을 깼다. 또 자고, 4시쯤 일어났다. 8시쯤 버스회사에 가서 "Loikaw" 로 가는 차가 있느냐고 하니 외국인은 그 곳을 가지 못한다고 했다. 시장에 가서 여러가지 반찬을 시켜서 국과 같이 식사를 했다. 국이 김치국처럼 시원하다. 그리고 트럭 정류장에 가니 사람들이 트럭 위에 짐을 싣고 있었다. 곧 냐옹쉬웨로 출발하려 해서 나도 그 트럭 버스를 탓다. 양쪽으로 좌석이 있는데 열 명 정도 앉는다. 사람이 더 타면 중간에 조그마한 의자를 놓아 그 곳에 앉아 간다. 땅쥐는 해발 1000미터 정도 되기때문에 12월엔 제법 쌀쌀하다. 영국이 미얀마를 지배할때 이곳 날씨가 좋은 땅쥐를 선택해서 이곳에서 샨지방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 트럭을 타고 몇백 미터 아래로 내려오면 냐옹쉬웨가 나오는데 그곳에 오면 날씨가 좀 덥다. 트럭안에서 간혹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만나면 나에 대해 소개하고, 여러 이야기를 한다.
12월 16일
주일이 되어 "First Union Baptist Church"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주일학교는 오전 8시에서 10시, 대예배는 10시30분에서 11시30분까지 드린다. 아이들도 예쁜옷을 입고와 예배드리고 어른예배도 예배당 한가득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 돌로 지어진 웅장한 예배당, 길다란 나무 의자, 말은 알아들을 수없지만 은혜롭다.
12월 17일
여느날 처럼 룩색을 지고 호텔을 나와, 떡과 빵으로 아침을 먹고 국제학교를 방문했다 월학비가 300불 수준이다. 외국인교사가 한 두명 있고 영어와 미얀마어를 가르치고 시설은 잘 되있었다. 또 중국인 교회에 들러 그곳에 싱가폴 SBC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 있어 좀 이야기 하고 길을 가는데 Chin 침례교 목사가 나를 발견하고 그의 오토바이로 산 정상까지 데리고 가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 보게 해 주었다. 잘 도시 계획된 아름다운 도시였다. 호텔로 돌아와 좀 쉬고있는데 내가 성경책을 준 청년 oukar(오까)가 왔다. 저번 방문 때 만나 영어 성경을 한 권 주고 읽으라고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Chin 침례교목사와 필립전도사를 알게되어 인레호수 부근을 자세히 보게 되고 전도지도 계속해서 공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까 부모형제는 다른 지방에 있고 교회에서 주일, 수요일, 금요일 찬송을 인도한다고 하고 나에게 조그마한 선물도 가져왔다.
12월 18일
새벽에 잠을 깨니 머리가 아프다. 밤마다 추위와 싸워야 했고, 공기가 건조해 코가 따갑고, 피부는 가렵지 않아 좋은데 팔다리가 허연 버짐이 일어났다. 오늘 오후 2시반 차로 양곤으로 간다. 따뜻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침례교회로 가니 본당 문이 열려있었다 들어가 그동안 있었던 일에 감사하고, 기도제목이 생각나는 대로 기도했다
12월 19일
양관으로 내려오는 버스를 탓는데 내 좌석은 제일 뒷줄 제일 구석이었다 내 옆에는 선원이 앉았는데 일년에 9개월 정도는 배를 타고 설탕, 쌀 등을 싣고 한국, 중국 일본을 다닌다고 했다. 한번 출발하면 24시간 계속 운항해서 20일 넘게 걸려 한국에 도착하는 모양이다. 버스는 밤길을 계속내려왔다. 험하고 위험한 곳이 많다. 우기에는 낙석의 위험이 대단하다. 서너 번 휴게실에 섰는데. 샨국수를 먹고 새벽 5시가 넘어 양곤에 도착했다, 여기서 오후5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전에 왔을때 찍은 사진을 들고 공항건너편 식당에 가서 종업원에게 이 친구를 찾는다고 했더니 그 사진이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사진을 주고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오늘은 한국에 대선이 있는 날이다. 비행기를 타니 사람이 30명도 안되는 것 같았다. 프놈펜에 도착해 몬돌길이 호텔에 체크인해서 KBS WORLD 9시 뉴스를 보았다 박근혜후보가 앞서고 있었다. 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임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께 먼저 예배하고 하나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정치를 하는 것이 순탄한 길이요. 순적한 길을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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