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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네스트 웅 몰리반 목사, Pastor Ernest Ung Molyv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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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Kosal Seok 자매 가족과 함께, 앞줄 좌측 양복이 웅 몰리반 목사. (12. Apr. 2018)


1970---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론놀 정권 (Lon Nol Regime, 크메르 리퍼블릭) 은 시하누크왕을 폐위축출 시켰다. 그 때 시하누크왕께서는 중국으로 피신을 가졌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파리에서 유학을 한 인텔리였다. 아버지는 왕실을 호위하는 군 고위직 간부셨고 내가 자탈때에 라나러드 왕자와 그의 형제들과 놀았다. 나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불어교사였다. 집에는 돈과 금과 다이아몬드등 보석이 많았고 하인들이 집안일을 하며 맛있는 음식들이 늘 준비되어 있었으며, 우리 집을 지키는 경호 군인들도 많이 있었다. 아마 내 생각에는 프놈펜 시내에서 우리 집이 가장 크고 멋진 집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나의 집 안에는 세 가지 종교가 공존하였다. 친가의 할아버지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절기 때마다 많은 승려들을 집에 불러서 늘 행사를 많이 했다. 속으로 나는 승려들을 별반 좋아하지 않았다. 외가의 할아버지는 유교 신자로 공자와 조상신을 모셨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가톨릭이셨다. 이 세 종교 사이에서 '어느 신이 진정한 신이란 말인가?' 투덜거리며 나는 아무 신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신이지 나의 능력이 하나님이지' 하면서 교만을 떨었고 이것이 큰 나의 죄였다.

론놀군이 아버지에게 쌀과 약품을 베트남으로 보내는 직임을 맡겨서 아버지가 그라체 스누을 지역에 전근 보내졌고, 그 때 이후 연락 두절 되셨다. 아버지가 행방 불명 되셨어도, 집에는 돈이 있고 부유하여 나는 여전히 교만하게 살았다. 학교에서 재력 있고 힘 있는 가문의 학생들만 골라서 친구로 삼았고 가난한 학생들이 친해지려고 다가오면 경멸하고 미워하였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하여 나와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서 대장 노릇을 하였다.

어느 날 비즈니스를 크게 하는 한 친구가 "몰리반 오늘 우리 교회에 행사가 있는데 가자."고 권유했다. "기독교는 캐나다나 미국 등 서양 사람들 종교지, 왜 캄보디아 사람인 내가 예수를 믿어? 난 그런 종교를 믿지도 않고 그런 곳에 안간다" 이렇게 대꾸했다. "거기 가면 얼마나 예쁜 여학생들 많은지 알아? 파티 정말 재미있다니까. 가자! 응?"예쁜 여자애들?" 이 말에 혹하여 1973년 12월에 프놈펜 베다니 교회(CMA) 크리스마스 행사에 갔다. 그 교회에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날 'Take my Life, let it be done(나의 생명을 받으소서 주 뜻대로 되리이다)'이라는 찬양소리를 들었다. 예배 후에 그 교회 목사님께서 "몰리반! 너 예수님을 너의 구주로 영접할래?" 그때 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났고 그 교회와 목사님에 대해서 저주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왜 내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세요? 당신이 뭔데 감히 내게예수를 믿으라 마라 하냐고요!” 버럭 소리 지르고 나와서 그 교회에 가자고 한 친구에게 욕을하고 그 후 두 번 다시는 그 친구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목사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기독교에 대해 더 적대적이 되었다.


1975년에 우리 가족 어머니와 8남매는 프랑스에 이주해 가서 살려고 비행기표를 샀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께서 "얘들아! 4월 효율츠남 (캄보디아 새해)를 지나면 곧 바로내 사촌 생일이야. 생일파티를 해주고 프랑스에 가도록 하자”고 하셨다. 그런데 4월 17일, 크메르 루즈 연합군(프랑스 유학파, 중국 배후(마오쩌뚱)의 그룹, 러시아와 베트남을 배후로 하는 그룹)이 총 3개 그룹의 5명의 리더로 집단 지도체제를 갖추고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옷을 벗어서 흔들며 '째이요! 째이요!"(만세! 만세!) 환호하였다. 크메르 루즈가 점령하면 상하가 없고 빈부 귀천이 없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평화의 나라가 도래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였다. 그 크메르군들이 프놈펜 시민들에게 프놈펜을 떠나서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 곳으로 옮겨 준다며 사방팔방 고향 쪽으로 길을 떠나라고 광고 하였다. 현직 공무원들은 직위,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안전을 보장 할 테니 도시 한 가운데 광장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고 광장에 나갔던 공무원들은 모두 총살당해 죽었다. 주민들은 하나 둘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 집에 사람들은 이미 떠나가고 저녁이 되니 적막하여 프놈펜 도시가 불빛하나 없이 깜깜해졌다. 우리 식구와 친척 17명은 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대부분 정부 고위관리이고, 교수 의사 등 고급 전문직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태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어 있었다. 밤에 총알이 오가는 교전이 있었고 폭탄이 터지곤 하였다. 주민들이 떠난 곳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그 지하실에서 우리는 닥칠 미래에 대한 공포감으로 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어깨에 총을 멘 어린 세 명의 크메르루즈군이 우리 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모두 10대 중후반 밖에 안 되는 청소년이었다. 총부리를 나의 어머니에게 겨누면서 현재 입고 있는 그대로 이 집을 떠나서 프놈펜을 나가라고 했다. 더 이상 지체 시에는 총살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집에는 금, 다이아몬드, 달러 등 값진 물건들이 많았지만 단 하나도 챙기지 못한 채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고향 쪽 으로 가지 않고 끼은쓰바이로 가기로 했다. 혹 거기서 기회를 봐서 베트남으로 탈출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골목을 나와서 길을 걸어 갈 때 길 옆에는 곳곳에 검은 시체가 버려져 있었고 우리는 두려움에 치를 떨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이여! 오 신이여!' 하며 계속 신을 불렀다. 그러나 사실은 어느 신인지 알지도 못하는 신을 부르면서 걸었다. 병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어깨에 붕대를 감은 환자들, 그밖에 입원한 중환자들, 모든 환자들에게 병원을 떠나라고 독려하고 있었고 환자들도 아픈 몸을 이끌고 길을 떠나 피난길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창 젊고 어린군인들(16, 17, 18세 정도의 청년들)은 맹렬하고 잔인하였다. 그들은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논농사 지역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서 도시민들을 강제로 이동시키고 재배치 시켰다.

정오 쯤, 메콩강변에 이르렀을 때, 나는 몹시 목이 말랐다. 캄보디아에서 4월의 대낮은 말 그대로 폭염속이다. 나는 강물을 마시려고 강둑으로 내려갔다. 그 강물은 차마 마실 수 있는 물이 아니었다. 강물 위에는 시체가 여기 저기 떠있고 피로 인하여 마치 뻑뻑하게 탄 커피색깔과 같았다. 생애 최초로 그 더러운 물을 극한 목마름 때문에 두 손으로 떠서 마시는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집에서는 시원한 에어컨과 푹신하고 편안한 침대가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고 깨끗한 생수만 마셨는 데 이 악취 나는 물을 마시고 있다니... 거기서 나는 단 하루 만에 내 삶은 이 더러운 물로 갈증을 해소해야하고 길거리 아무데서나 땅 바닥 위에서 잠을 자야만 하는 신세가 된 나는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 버렸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저주했던 교만한 사람이 받아야하는 마땅한 벌이 아닐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우리 식구가 쯔방엄뻐으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크메르 군인들이 우리 이모부가 정부 관리였다는 것을 알아보고 달려들어 잡고 그 자리에서 즉시 칼로 가슴을 찔러 그 다리 위에서 죽였다. 행여 크메르 루즈 청년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 차릴까봐 우리 식구들 누구하나 아는 척하거나 놀라움과 슬픔과 고통의 표정을 나타낼 수 없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 독립기념탑에 모였던 전직 공무원들이 총으로 몰살된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크메르 루즈 혁명군들의 계획은 옛날 사고의 잔재를 모두 지워 버리고, 많은 사람들 특히 교육받은 사람들, 브르주아 계층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사상으로 대체하기를 원했다. 크메르혁명군 당원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을 쁘로 찌어준트마이(뉴피플)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노동력으로 활용할 뿐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보삿에서도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고 그 캠프들은 Labour Force Camp라고 불렀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노동자 캠프를 나누어 가족들을 분산시켰다. 칼을 한 자루씩 나누어 주면서 숲속의 대나무를 베어 와 직접 손으로 자신의 집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곳에 거하며 극심한 노동을 하며 살다가 병 들거나 굶주리거나 처형되어 하나 하나 죽어 갔다. 하루에 두번... 새벽 5시부터 12시까지 노동하면 쌀을 한 숟갈만큼 주고, 적은 양의 물에 넣고 끓여 미음처럼 먹게 하고 오후1시에서부터 저녁 7시까지 다시 노동한 후에 또 한 숟갈의 쌀을 주면 그 것으로 물에 넣어 끓여 먹게 했다. 우리는 훔치는 법을 배워야 생존 할 수 있었고 혹 훔치다가 크메르 루즈군에 발각되면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 낮에 벌레와 곤충 그리고 먹을 수 있는 풀잎이 있으면 주머니에 숨겨놓고, 운 좋게 논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잘 챙겨두었다가 쌀에 물을 부어 끓일 때에 같이 넣고 끓여 먹어야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일년에 단 하루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쪼룰츠남트마이(캄보디아 새해, 보통 4월 13-15일) 날이었다. 평소에는 너무 먹지 못해 창자가 들어 붙을 정도 였는데 그날은 마음껏  먹으라고 닭도 주고 쌀밥해먹을 수 있는 만큼 쌀도 나눠줬다. 너무 오랫동안 적게 먹는 것이 길들어진 사람이 갑자기 많이 먹으면 몸이 소화를 해내지 못하여 고생하였다.

배가 고프고 절박하면 무서운 것이 없어진다. 한번은 코브라가 나타났다. 그 시절 코브라 한 마리는 금은 보화보다 귀한 것이었다. 평소 힘 좀 쓰는 청년 두세 명이 코브라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이리 저리 내리쳤지만 잡지 못하였다. 창자가 뒤틀리는 배고픔은 두려움을 모르게 만든다. 나는 맨손으로 코브라의 머리를 꽉 잡고 그 몸통과 꼬리를 휘감으면서 땅바닥에 내리쳤다. 두 세번 패데기 치니 코브라가 죽었다. 우리의 건강식이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며칠 전에 집에 조그만 뱀 한 마리가 나와, 아내 이반이 나한게 잡으라고 했을 때 무서워서 잡지 못했다. 나락을 훔쳐서 씹어 먹었고 웅꼬챠우(익지 않은 이삭)가 나오면 금방 따서 먹으면 하얀 액즙이 나오는데 그것을 먹고는 배탈이 나곤해서 여러 명이 설사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나의 어머니와 외삼촌, 세형제과 세누나가 뽀삿 노동캠프에서 배고픔으로 인해 죽었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밤에 무덤을 지나 불침번이 조는 동안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덤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전혀 두렵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무덤위에 누워 있을 때도 있었는데 편안하게 느끼지기 까지 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험을 무릎 쓰고 도착해보니 나의 어머니는 뼈만 앙상히 남아 누워있는데 힘이 없어서 제 이름 조차 부를 힘이 없었고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다녀온 며칠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뽀쌋 농장에서- 매일 밤마다 쁘로쬼 꼬상 이라는 회의를 했다. 크메르 루즈 혁명당이 얼마나 좋은 점이 많고 훌륭한지 찬양해야만 했고 하루 동안에 잘못했던 일들을 반성하고 고백하는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무슨 잘못이나 실수라도 있을라치면 즉석에서 판결하고 처결하는 인민재판이 이루어졌다. 어느 날 저녁 일렬로 줄줄이 앉아서 모임을 할 때나는 우리 막내 외삼촌 옆에 앉았었다. 실수로 외삼촌이 크메르 군인의 다리를 슬쩍 부딪쳤는데, 갑자기 그크메르루즈군이 마이크로 "원수 한 명을 찾았다"고 소리치고 여러 군인이 외삼촌을 끌고 숲으로 갔다. 그 다음날 다른 사람으로 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그들이 정글에서 나의 막내 외삼촌 오른쪽 가슴을 칼로 찔러 열어 간을 꺼내 먹고 묻어 버렸다고 했다. 이렇게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었거나 살해당한 사람이 백칠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오백만 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민주 캄푸치아(크메르루즈 집권 할때 정부이름; 1975-1979년) 치하에서 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음의 벌판에서 사라져 갔다.

1979년에 훈센 (Hunsen), 찌어찜 (Chea Sim), 행쌈른 (Heng Samrin) 을 앞장세운 베트남군이 크메르 루즈 혁명군과 전투하여 이들의 압제에서 해방 시키러 밀고 들어와 교전하였다. 크메르 루즈 군대 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세 그룹의 지도자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다보니 의견이 각각 달랐고 단합되지 못하였다. 자연히 베트남군에 밀려 크메르군은 북서쪽에 있는 빠일런으로 밀려 나갔다. 베트남 군이 캠프앞을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구동성으로"이젠 살았다! 우린 살았다!" 외치며 기뻐했다.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린 이제 살았습니다!" 다시 한 번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감사했다.

살아남아 가족을 만난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제각기 고향으로 돌아 가지만 홀홀 단신인 나는 프놈펜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하고 서쪽인 태국 쪽을 향하여 걸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또 가족들이 정답게 웃으며 이야기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 참으로 아름다웠던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캠프에서 아사한 어머니와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너무도 그립고 슬펐다. 혼자 살아남은 나의 삶이 너무 비관되어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 두 세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배가 너무 고플 때는 산과 정글의 나무에 달려있는 야생 열매와 잎파리 길가에 자란 풀을 뜯어 먹으면서 허기를 채웠다. 뽀삿에서 태국 국경까지 가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어떤 산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많은 캠프가 있는 것을 보았고 빨간 십자가가 보였다. 내 가슴은 희망과 기쁨으로 뛰었다 국경을 이어 태국 땅으로 들어갔다. 카오이당( Kao I Dang)이라는 난민촌에 들어갔을 때 나는 희망이 생겼고 안도감을 느꼈다. 과거는 고통스러웠지만 나의 미래는 약속되어 있었다.

캠프 쪽으로 가까이 가보니, 한쪽에는 불교 절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기독교 교회가 있었다. 원래 캄보디아 전통대로 라면 부모가 돌아가신 때에는 삭발하고 절에 가서 부모님에게 예를 표하는 묵념을 드려야 하는데. 나의 몸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이끌려 반대쪽으로 향했다.

비록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지만 교회 쪽으로 걸어갔다. 그 옛날처럼 예쁜 아가씨들을 만나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 'Take my Life, let it be done(나의 생명을 받으소서 주 뜻대로 되리이다)'라는 예전에 들었던 찬양이 흘러 나오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교회에 들어갔다. 그 예배당 안은 청소년들과 어린이, 어론들까지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 목사님께서 “몰리반, 주님을 믿고 영접 하겠니?”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나의 삶을 주님께 드렸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기로 했다. 나의 삶은 새롭게 됐을 뿐 아니라 목적 있는 삶이 되었다.

나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였고 전도 팀에 가입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나는 마이롯 난민촌(Mairot Refugee Camp)에서 지금의 나의 아내 이반이라는 아가씨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다.

난민캠프에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다. 일주일에 한번 씩 미국을 비롯한 유엔에서 구호품을 가져다 줬고 가족 단위로 물자를 공금 했다. 쌀 몇kg, 생선 몇 마리, 돼지고기, 야채 등과 설탕, 식용유, 소금, 생선 액젓, 심지어 담배까지...다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잘 모아 두었다가 태국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물품이 남았을 정도로 충분히 공급되었다.

난민캠프 안에는 크메르 루즈에서 혁명 활동하던 사람들도 숨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크메르 루즈들이 빠일런으로 퇴진할 때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왜냐면 그의 만행이 알려지면 주민들에게 돌 맞아 죽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들은 숨죽이며 피난민 행세를 하고 하루하루 불안함 속에서 살았다. 캠프 내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고 따랐지만, 그 중 일부 무리들은 당을 만들고 암암리에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그들이 나에게도 물어왔다. "여기 숨어들어온 크메르 잔당 놈들을 죽여 버리자. 이미 그 자식들이 누군지 거의 알고 있다. 너도 같이하자."

그때 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로마서 12:17)

 

뉴욕에 있는 중국계 Alliance 교회의 보증과 지원으로 저와 이반, 장모님 처남 등과 같이 1982년 2월에 나는 미국에 도착했다. 영어는 'Yes' 또 'No' 딱 두 단어 밖에 몰랐다. 사람들이 무엇을 물어볼 때 그냥 '예' 하거나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언어가 안 되는 난민신분으로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건물 청소하는 것이었다.

그즈음 내 맘속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소원이 생겼다. 내가 목사님이 되고 싶어졌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목사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목사님께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몰리반!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고 목사님이 될 수도 없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영어 제 2 외국어 프로그램을 수강하였다. 낮엔 청소를 하고 밤엔 열심히 공부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곧바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인 GED(Graduate Equivalency Diploma)를 준비하여 시험을 쳤고 드디어 대학을 갈 자격을 얻었게 되었다.

목사님께서 도와 주셔서 1985-1989년에 나약성서대학(Nyack Bible College)에서 사회학(Social Science)을 공부했다. 그리고 바로 얼라이언스 신학 대학교(Alliance Theology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1989-1991)을 밟게 되었다. 이미 1984년부터 CMA 평신도 교역자(TET pastor)로 항상 교회 활동에 참여 하였었지만 1990년에 드디어 목사님들이 안수하여 전임 목사로 세워주셨다. 나는 기뻐 뛰었고 하나님께 무한 감사하였다.

1989년, 뉴욕에 온 이후 처음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포놈펜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 내 심장은 요동치고 폭발할 것 같았다. 과거 크메르 루즈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온몸이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고향집은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 프놈펜은 얼마나 변했을까? 수많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갔다.

도착하여 제일 먼저 내가 살던 집을 찾아갔다. 내 집은 어떤 나라의 대사관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그 대문 앞에서 나는 통곡을 했다. 내 사랑했던 어머니 어려움 모르던 유복했던 유년시절 형과 누이들 너무 보고 싶어서 땅에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 그 때 어릴 적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만나게 되었는데, "몰리반! 나 네 누님 어디 계신지 안다. 만나러 가볼래?" '내 누나가 살아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쁨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를 따라 문화부로 발길을 향했다. 친구에게, "누님을 만나면 내가 누군지 말하지 말고 손님이 한사람 찾아 왔다고만 해" 부탁을 했다. 친구가 누님을 불렀고 누나가 나에게 다가오면서 “품리읍 쑤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인사를 하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의 누님은 너무나 깡마른 중년의 여인이었고 얼마나 가난하게 살아 왔는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내 눈엔 눈물이 가득히 흘러 내렸고 나는 "누나! 나 몰리반이야! 누나 동생 몰리반이야! 살아 있었구나. 누나!" 누님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니 너무나 놀라고 기뻐 한것은 말할 나위 없었다.

"이제 네가 살아 돌아왔으니, 절에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우리 형제들을 위해 묵념을 드리자" "누나! 난 그건 못해. 나는 예수님을 믿거든. 그리고 나는 목사가 되어 섬기거든, 누나 ! 누나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아야지." 내 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 슬하에 4남4녀 중 맏딸과 셋째 아들인 나만 생존하고 나머지 3형제 3자매가 다 죽었다.


내 누님은 문화 예술 활동을 하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누나와 매형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캄보디아 전통 예술 활동을 하면서 문화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내 조카들은 둘 다 부모의 끼와 재능을 이어받은 가수로 요즘 가장 핫한 아이돌 가수 놉 바이어릇(첫째 조카)과 니꼬우(놉 쁘리어랍- 둘째 조카)다.
누나와 나는 우리 집을 되찾으려고 백방 알아보았는데, 일가족이 모두 등록을 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나와 누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나는 미국으로 되돌아 가야했다.

지금도 누나와 그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도록 매일 기도드린다.

1994-2004년 거의 10년간은 나는 CCC (Campus Crusader) 가 UN 산하에 만든 Christian Embassy 라는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나는 캄보디아 유엔 대사와 가족이 뉴욕에 오면 집도 구해주고, 자녀들이 다닐 학교도 입학시켜주는 봉사를 하게 되었고 그 중에는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캄보디아 국가 대표들이 워싱턴에 오시게 되고 교민들과 만나는 모임이 많아지면서, 오시는 분들 가운데는 제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은 저를 끌어안고 많이 우셨고 캄보디아로 돌아오라고 여러 번 제안하셨다. 캄보디아 커뮤니티 교회를 계속 목양하면서 주님의 뜻을 구하였다. 이반과 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우리 부부를 캄보디아에 선교사로 파송하여 주십시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2004 년에 선교사로써 나의 조국 캄보디아에 돌아오게 되었다.Tom Nup Tuek Church 양솟 KEC (CMA) 양쏫목사님 교회에서 목양을 하기 시작하면서 지방 곳곳에서 박해와 어려움을 당한 선교사들과 캄보디아 지방교회 목사님들을 많이 돕고 있었다.

유엔에서 자주 만났고 친인척이나 마찬가지이신 부 수상께서 정부에 와서 나의 지혜와 지식을 조국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제안이 왔다. 나는 고위 관직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크메르 루즈의 그 끔찍한 폭정을 지나 맨몸으로 미국으로 보내진 내 삶은 이미 주님께 바쳐진 몸이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은 엑스트라의 삶일 뿐이라 생각했고, 특히 고위 관직자였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크메르 시절의 교훈으로 정부 고위직 제안이 내겐 전혀 유혹으로 다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끈질기게 제안을 하여 오므로 나는 동료 목사님들과 선교사 여러분들에게 자문과 기도를 청하였다. 그 분들이 기도한 후에 이구동성으로 "가서 우리들 도우라" 하였고 많은 목사님들이 안수 기도하고 제가 캄보디아 정부 보좌관으로 일하도록 파송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정부 일을 하도록 이끄신 그분에게 "저는 보좌관이기 이전에 목사이기 때문에 정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고 분명히 했고 그분도 그 부분을 이해하시기로 했다. OCM (Office of Council Ministers) 에서 일하면서도 나는 허드렛일들을 하는 청소부, 경호 직원, 수위들에게 친절하게 인사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예수를 전했다. 무슨 회의를 하던 간에 성경을 펴서 읽고 기도로 시작하므로 다른 보좌관들이나정부 고위 관직자들이 나를 매우 싫어하고 경멸하며 조롱하였고, 나를 '예수'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고 뒤에서 쑥떡거리며 놀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쭘리읍 쑤어 '하면서 그들에게 인사하면 그들은 못본 체, 못들은 체 지나가기 일쑤였다. 보다 못한 쏙안 부총리께서 그들에게 이 사람은 교회 목사님이기 때문에 '예수'라고 부르지 말고 'Reverent (목사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2004년 이후 한결 같이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그들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하여 이제는 '예수'라고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저를 존중하여 서로 '쭘리읍 쑤어 '인사를 한다. 내가 낮추고 겸손할 때에 원수가 없어지고 주님이 나를 높여주신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장 4-7절)

그 관직에 있으면 검은 돈과 뇌물을 받을 기회가 많이 있다. 어떨 때는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 오기도한다. 그런 돈을 받지 않는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그 분만 의지하여 살기에 그 유혹들은 내게 전혀 유혹이 되지 않는다.

여러 관리들의 가정에도 여느 가정과 같이 많은 문제들이 있다. 나는 그런 기회를 만날 때마다 상담을 하고 그들이 가정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그 가정에 소개한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단 종교가 보고되면 위에 계신 분들에게 조언을 드린다. 요즘은 경제지원을 조건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어서 경계를 풀 수 없다.

캄보디아에 만연한 마약퇴치, 알콜 중독자 계몽, 가정폭력 상담, 인신매매 근절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와 같은 때에 나를 사용하시기를 기도한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기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 5장 19-23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에베소서 6장 10절-13절)

어떻게 하나님께서 죽음의 들로부터 나를 구하시고 보호하시고 동행하셨는지 간단하게 요약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나의 인생에 역사하고 계신다. 나의 삶으로 갚아 드리는 것 이외에는 주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나의 사명은 나의 사랑하는 민족에게 예수를 가르치는 것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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