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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밧모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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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하란, 안디옥, 소아시아 일곱 교회 그리고 밧모섬 등을 둘러보는 여행을 대부분 목회자 사모로 구성된 팀과 같이 하게 되었다. 이십여년 전 이스라엘과 시내 반도의 순례일정은 여러 번 해보았지만 이 소아시아의 밧모섬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사회생활을 끝내고 해외 생활을 하다가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또 선교 생활을 하다기 맞이한 소중한 기회이었고,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들 이었다.

새벽에 이스탄불에 내려 한식을 먹고 바로 모스크로 변해버린 성소피아교회, 보스포로스해협, 그리고 이어지는 날 동안 방문한 욥의 동굴, 하란대학교 유적, 최초로 크리스찬이라고 불려진 안디옥, 다소의 비울의 생가 등 하나 하나 감동이었다. 지난 선교 생활 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해주시는 것 같은 알차고 교육적인 여행이었다. 호텔과 음식도 좋았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부르크라고 부른다. 고구려와 동시대에 살았던 돌궐의 다른 발음이 투르크이고,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고구려와 돌궐은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불렀고, 터키인들은 아직 코리아를 형제의 나라로 부른다. 그들은 이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날 까지 한국을 기억하며 사랑을 베풀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돌궐이라는 단어 밖에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터키에 대해 생소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결혼한 사이이고, 이와 같이 혈통적으로 교류가 상당했으리라 보여진다.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 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난다는 곳, 보스포로스해협 위의 크루즈를 타고 해협의 이쪽과 저쪽,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나뉘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터키사람들도 아시아사람과 유럽사람의 중간형태의 모습이었다. 지중해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따뜻한 기후, 올리브, 사과, 면화, 여러 농작물이 풍부하고 양들이 들판에서 떼로 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처음 방문한 터키였는데도 벌써 호감과 친근감이 밀려온다. 음식으로 나오는 다양한 치즈, 올리브는 그 곳에 살고 싶은 마음이 나게 했다. 참 축복된 곳이구나. 이렇게 좋은 날씨, 땅들.

 

그런데 왜 터키가 이슬람에 빠졌을까. 몹시 안타까웠다. 우리와 가깝게 지냈던 친척 같은 족속이 멀리 멀리 가더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를 믿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도 선교가 절실하게 빨리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선교가 아주 힘들다고 한다. 북한이 악의 정권에서 해방되고 예수를 믿어 그 강인한 고구려 정신으로 이 옛 친구인 터키에 가서 복음을 제시하는 꿈을 꾸어본다. 이 아름다운 땅. 이 축복되고 풍요로운 땅. 이 곳에 또 독사가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 불쌍한 돌궐사람들. 우리친척이요 이웃이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와 풍경을 보면서 생각이 착잡하다.

생각은 이제 선교전략쪽으로 이동해간다. 그럴수록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캄보디아에서의 선교전략과는 차원이 다른 어렵고 많은 고난이 동반되어야 하는 선교일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생각은 풍경 감상과 전략 구상 사이를 오가며 그 국토를 달려간다. 장거리 이동시에는 한사람 한사람씩 앞으로 나와 자기가 이제껏 해온 사역을 소개한다. 농촌 목회를 하시는 분, 노방전도를 계속해오신 분, 사모님들도 한분 한 분 어떻게 내조를 하며 사역을 도왔는지 모두들 자기 사역을 이야기 했다. 34 명의 이 순례팀은 어찌보면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한 사역자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간주될 수 있다. 나 또한 선교사로서 그 한국교회의 하나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장로님, 권사님도 계시고 그리고는 모두 목사님과 사모님들이다.

 


차는 그 넓은 들판을 계속 달려갔다. 광활하게 계발된 면화밭, 올리브농장, 사과밭, 포도 밭. 사과추수는 해놓았는데 그냥 들판에 수북이 쌓아놓았다. 터키는 농업국이다. 참 부럽다. 사역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그 속에서 수 십년 지나온 세월동안의 노고와 고난과 아픔이 묻어나옴을 느낀다. 어찌보면 모두 다 힘들게 사역을 해온 것이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자녀들을 희생해가면서, 교회건축 때의 애로사항들, 하나하나 우리들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제 우리가 둘러보게 될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대해 계시록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사악한 것을 용납지 않고, 이단을 조사해서 용납지 아니하고, 여러 세속적인 일을 증오하고, 가난한 가운데 참으며, 핍박 속에서도 참으며, 사랑을 베풀고 적은 힘을 가지고도 주의 이름을 지키며 말씀을 지키고, 천국의 소망을 간직한 여러분의 인내와 수고를 내가 아노라” 우리도 이런 격려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나는 이번 여행이 다분히 교육적이고 소아시아 일곱교회처럼 한국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주님으로부터 받는 그러한 기간이었다는 것을 이 여행이 끝나갈 때 쯤 알게 되었다. 이 여행은 분홍 빛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나중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여행을 인솔하시는 목사님은 경험이 풍부한 분이셨다. 벌써 수십차례 이 코스를 인솔하셨고가는 곳 마다 자세한 설명과 꼭 보아야 할 곳을 놓치지 않고 방문하였기에 일정은 빡빡하였지만 편안한 숙소와 좋은 음식으로 피곤함이 덜하였다. 나 자신도 이전에 이스라엘 시내산을 여러 번 인솔한 경험이 있었기에 인솔하시는 목사님의 고충과 배려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여행사에서의 근무를 마지막으로 89년도 싸이판으로 이주하고 94년도 싱가폴로 가고 97년 신학을 마치고 캄보디아로 와서 이제 2013년 이 순례의 길에 동참하게 되니 실로 24년 만에 맞이하는 가슴벅찬 순례 여행이었다. 89 년 이전에는 그냥 여행이 목적이었고 돈벌이가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깨어지고 사역의 길로 들어서고 주님의 은혜가운데 생활하면서 맞이하는 순례이기에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여행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원하였다.


여행을 인솔하시는 목사님이 캄보디아에 오셔서 성서 지리를 강의하시고 한국에 가시더니 이번 10월에 터키, 밧모섬 여행일정이 있는데 내가 경비 조금만 부담하고 팀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내가 직접 보고 오면 앞으로 캄보디아 신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데도 유익하리라 생각하셔서 특별히 배려하신 것 이었다. 그러나 나는 별 흥미가 없었다. 그 무너진 돌 무더미를 보고 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 제의를 거절했다. 얼마 후 다시 연락이 오셔서 이번 기회는 좀처럼 드문기회이기에 잘 생각해보고 합류하기를 권하셨다. 그렇게 유적보다는 하나님이 이 여행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시는 가에 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소아시아 7개 교회의 유적을 보았다. 그리고 밧모섬으로 갔다. 한번 가보고 싶었던 밧모섬, 요한이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적은 곳, 계시록 동굴 교회와 수도원을 보고 성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다시 배를 타고 터키의 쿠사다시항으로 돌아왔다. 배 안에서 네덜란드 순례팀을 만나 즐겁게 교제를 했다. 서로의 언어로 찬송하고 소개도 했다. 밧모섬은 그리스 영토이기 때문에 우리는 출입국 신고를 해야했다.

그 여권검사하는 장소에서 갑자기 큰 사이렌이 울린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무슨 일인가? 자세히 보니 벽에 붙어있는 비상벨이 고장이 났는지 오작동을 하는지 계속 울어대니 수리하는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것을 멈추려고 한다. 밧모섬을 다녀왔지만 큰 감동을 받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돌아오는 길에 배에서 내려 여권 검사하는 장소에서 갑자기 울어 대는 비상벨 소리는 '이제 비상 시기다. 빨리 준비해라. 시간이 없다'는 메세지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그냥 오작동된 싸이렌 소리라고 별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한다. 오작동된 이것을 다시 수리 해놓으면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고, 또 다시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나는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메시지를 구했었고, 24 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마침내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24년의 세월이 평범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요. 이 불신자를 억지로 되돌려 사역자로 만들어 놓으시고, 내 사역이 또한 이 시급한 때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그러한 사역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로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평범한 고장난 듯한 싸이렌소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제 터키에서 그리스쪽으로 넘어가 사도바울이 유럽에 첫발을 디딘 네압볼리로 가서 기념교회를 보는데 또 싸이렌 소리가 났다. 한 분이 놀라서 나에게로 달려와 또 싸이렌 소리가 난다고 했다. 아마 구급차인지 경찰차인지에서 나온 싸이렌 소리인 것 같았다. 이 곳에서부터 어떤 한 분이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해서 빌립보 교회에서는 확연히 그 상태가 심각하게 되었다. 차안에서 그 분을 위해 계속 기도했다. 한분 한분 교대로 손을 얹고 기도하고 축사를 하며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끌어안고 기도도 했다. 그러나 점점 그 도가 심해져갔고 입에서는 더럽고 부끄러운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나도 그 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 분은 내가 오래 전부터 아는 분이었다. 밧모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네덜란드 순례팀을 만나 너무 기쁘셨던지 좀 오버하는 듯하게 감정을 표출하시는 것 같았는데 이곳에서 더러운 귀신이 들려버렸다. 루디아 기념교회, 데살로니카, 베뢰아, 메테오라수도원, 아테네에서도 계속 그 상태였다. 그래서 차안에서 또 식당에서 호텔에서도 계속 번갈아가며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일행이 순례를 떠나고 한 두명은 그 분과 같이 차 안이나 식당에서 있어야 했다. 고린도와 겐그리아를 지나 페리로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그 큰 밤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그 분은 주무시지 않고 소란을 피우시므로 교대 교대로 가서 기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이제 이탈리아에 와서는 운전사가 그 분의 상태를 보더니 그 분을 병원 응급실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차를 운행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차 안에서나 배안에서도 어떻게든 둘러대고 간신히 배도 타고 어렵게 이곳까지 있다. 결국은 그 분을 병원으로 보내고 남은 일행은 폼페이를 갔다. 이제는 그 분은 차를 타지 않고 호텔에 있는 조건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일행은 로마시내 관광을 나갔고 두 사람이 남아 그 분을 보호했다. 호텔 방에서 이른 아침 부터 오후까지 계속 성경읽고 기도하고 축사하고 권면하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난감한 일이었고 서글픈 일이었다.

 

나는 신학교의 선생이요 스무개 이상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한 선교사요 목사인데 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니. 주님은 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또 이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과 교파에서 오신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어씨면 한국교회의 민낯을이번 여행의 이 사건으로 인해 보게 하신 것이다. 방방곡곡에 십자가가 홍수를 이루고 세게 모든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경제가 발전하고 해외 여행도 많이 하고, 기독교인들이 많은 축복을 받고 자녀 교육도 잘 시키고 이렇게 소아시아 일곱교회, 하란, 안디옥, 밧모섬, 그리스 로만,순례여행까지 나오는 축복을 누리는데 막상 알맹이가 너무 부실한 것이다. 신앙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겉보기는 부흥한 것 같은데 속은 허약해서 골골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 이것을 보여주실려고 하나님은 이 순례여행을 특별히 조직하시고 보내신 것이다. “너는 너의 첫사랑을 버리고 허탄한 물질과 건물과 자녀와 신분 보장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음과 이 모든 우상숭배와 같은 것을 택하였도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을 나에게 주지 않고 너 자신의 정욕으로 다른 곳으로 가져갔도다. 교회, 믿음, 신부, 이러한 이름은 가졌으나 그 이름은 거의 죽은 자의 이름이 되어버렸도다.” 로마 일정을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갔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가장 큰 문제에 봉착된 것이다. 이제까지는 어떻게 하든 이 곳에서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또한 비행기를 탑승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안 그래도 지칠 줄 모르고 밤이고 낮이고 계속 고함을 질러대고 힘도 세서 제어하기도 힘든데 만약 공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바로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이고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누가 남아서 어떻게 이 힘든 일을 감당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일행은 먼저 공항으로가고 두명은 그 분과 같이 여행사에서 마련한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갔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였다.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수면제의 효과는 좀 있었지만 또 약간의 소란도 있었다.그것은 과거의 어떤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라고 설명하고 넘어갔다. 마침내 비행기를 탔다.기내에서 또 깨나서 이전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하나 모두들 기도했다. 의외로 비행 내내 잘 주무셨다. 그리고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벌써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이제 정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몇 일간 있었던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가 불충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를 타고 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노출시키시고 또 그것을 덮어주시는 하나님. 그 분은 어찌보면 우리를 위해 우리 목회자와 선교사를 위해 하나님이 쓰신 도구였다. 우리의 이 위선을 벗기시어 그리고 한국교회와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시려고 선택하신 인물이었다.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우리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이런 방법이라도 사용해서 우리의 눈을 열어보이시는 하나님! 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여행. 그 싸이렌 소리와 빌립보에서의 일. 같이 했던 많은 좋은 사람들. 이 일정을 주관한 목사님. 우리는 합력해서 선을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