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cut to Content

FootPrints/ETC.

사이판 여행 (Feat. 효석, 31.Aug ~ 4.Sep)

반응형

바다와 구름. 하늘이 아름다운 사이판

 

 

2022년 8월 31일.
집사람과 프놈펜을 출발해 인천에 도착해서 부근 숙소에 check in 했다. 영종보건소에서 코비드 검사하고 공항에서 효석이 만나 저녁을 먹었다. 효석이가 1990년 사이판에서 태어나 94년 싱가폴로 나올때까지 4년 이상을 살았지만 그곳 기억이 나지않고 해서 가보고 싶어했고 우리도 같이 가서 설명해줄 필요가있었다. 효석이도 미국에서 documentary 제작등 기록물 영상을 다루다보니 자신의 처음 생활에 대한 기억을 되 찿고싶어했다. 
떠난지 28년이 흘러 우리도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어떻게 됐는지, 이웃들은 그대로 있는지 궁금했다.
 1989년 한국에서 여행사에 근무할때 괌. 사이판 팀을 만들어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당시에는 직항이 없었고 일본을 거쳐 사이판에 갔다. 온통 일본인 여행자로 붐볐다. 한국인은 거의 없었고 바다 색갈은 창조때를 연상시키는 원색의 연두색. 남색등의 어디서도 보지못한 천연의 강렬한 색갈의 하늘과 바다가 나를 매료했다. 이 처음 방문후 나는 사이판으로 이주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분명 얼마있지않아 한국관광객도 밀려 들어올 것이기에 이곳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당시 한국의 겨울철에 왔기때문에 바바리 코트와 양복을 호텔방 옷장에 넣어두었는데 check out 할때 잊어버리고 그냥 한국으로 왔다. 이미 그때 겨울옷은 나에게 필요없다는 암시였나보다. 89년 이후로는 계속 싱가폴. 캄보디아. 더운곳에서만 살았으니..
한국에 돌아온 나는 신속히 움직였다. 다니던 여행사에서 사이판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89년 10월말경 나혼자 사이판 으로 와서 일본인 여행사 R&C 사무실에서 한국인 여행담당 지사장이 되었다. 여러 젊은 일본인 직원들은 쏟아지는 일본관광객으로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Grand Hotel 에 숙소를 정하고 한국에서 오는 여행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집사람이 한국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아이들 둘과 임신 8개월의 뱃속의 아기를 데리고 89년 12월 말경 사이판으로 왔다. 내가 집사람에게 지상의 paradise 라고 이야기 해놓았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건물이나 습도등에 좀 실망을 했다고한다.
수수페에 아파트를 임대했다. 그리고 내 나이 32세에 본격적으로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단시간내에 빨리 벌어 40대 부터는 편하게 인생을 enjoy 하는것이 나의 motto 였다.

 

인천공항에서

 

 

 

9월 1일.
T Way 항공으로 사이판에 도착했다. 공항건물은 그대로였고 차를 렌탈해서  드라이브를 하는데 새로 지어진 건물은 거의없고 그때 그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시하누크빌을 생각해서 이곳도 많이 변했으리라 추측한것이 크게 빗나갔다. 거리도 한산하고 좀 실망스러웠다. 호텔도 별로인데 3인이 하루 묶는데 170불 정도했다. 한식당에 가서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우리가 알고 싶은 여러 정보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했다. 날씨는 더웠고 그간의 누적된 피로로 낮잠을 자고 저녁때 서명동 선교사님을 만나러 혼자 나갔다. 이곳에 살때 예손장로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당시 여두성목사님이 담임하셨고 그분은 18년동안 계셨고 우리가 떠난후에도 오랬동안 계시다 한국으로 오셨다. 그래서 여목사님을 통하여 서선교사님을 소개받았다. 서선교사님은 2004년도에 사이판에 오셨다고했다. 봉제공장이 많이 있을때는 한족사역도 하시다가 이제 봉제공장이 다 떠나고 나서 차모로 원주민 사역을 하시고 선교사들에게는 영주권을 주어서 비자 문제도 해결되고 자녀 두명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하셨다. 경북대를 나오시고 고려대 대학원 또 신학을 하시고 한국에서 목회 하시다가 사이판으로 오시게 됐다고 한다. 태풍으로 교회 건물이 파손되기도 하고 조선족.한족들이 다 떠나고 해서 다른곳으로 옮길 생각도 하셨는데 중국인 동역자들과 챠모로 원주민 사역으로 길이 열려 열씸히 선교 열매를 맺고 계신다고 하셨다. 
이곳은 나에게는 인생의 그리고 선교사로 나가기전의 좋은 훈련장이 었다. 처음에 일본여행사에서 1년가까이 일하다가 Tug Boat 를 하는 Commonwealth Marine Company 를 만들어 현지인이 License 를 만들고 한국인이 한국에서 배를 가져오고. 한국인 선장과 같이 동업하다 배가 Tug Boat 하기에는 너무 작고 힘이없어 금방 폐업하고 나중에 선주는 배안에서 돌아가시고.. 나는 자금을 대고 참여했는데.. 큰 손실을 입고.. 나중엔 한국의 건설업자가 내가 가지고 있는 땅에 큰 콘도를 짓겠다하여 각자 지분을 정하고 건축 설계를 마치고 막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한국에 건축경기가 얼어붙으면서 그 분이 한국에 지어놓은 건물들이 분양이 안되 부도가 나고 그분도 잠적하고 나니 사이판에서 진행하던 project 의 부담을 나 혼자 떠안게되어 나도 생활이 심각한 상태로 빠지고 그 기간 정신이 들어 회개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매일 매일 주님을 붙잡고 살던 때가 생각난다. 새벽 기도에 가면 딴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심정을 토로하며 큰 소리로 울며 회개하며 기도했다. 여목사님 설교때마다 그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말씀이었고 고령의 이만열 선교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오셨을때 큰 은혜도 받고 예손교회가 작은 교회였지만 중국인 선교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해 봉제공장에 와있는 중국인들을 교회 봉고차로 데려와서 서로 교제하면서 중국말 하시는 선교사를 우리교회로 보내주시도록 기도했는데 싱가폴의 Life Presbyterian Church 의 장로님으로 계시는 Mrs. Sim 이 오셔서 3개월동안 섦기셨는데 100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와서 열기가 대단했다. Mrs. Sim 은 음악교사로 정년 퇴임하시고 64세의 나이에 오셔서 한국말도 모르시면서 새벽기도에 매일 나오셨고 나를 선교사로 훈련시키셨다. 그분이 떠나시고 내가 그 중국인들을 떠맡아 영어를 가르치면서 다른 선교사님이 오실때까지 버텼다. Mrs. Sim 이 싱가폴로 돌아가셔서 Singapore Bible School 을 추천해주셔서 원서를 냈고 기다렸는데 합격통지서를  Saipan 이 아닌 Spain 으로 보내는 바람에 그 학교를 못가고 Far Eastern  Bible School 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을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좀 난감했는데 나중에 캄보디아에서의 사역을 위해서는 영어로 신학하는것이 유용했다.

 

 

 

 

 

9월 2일.
아침에 효석이가 태어난 Commonwealth Health Center 를 방문했다. 1990년 2월 9일 저녁무렵 집사람이 진통이 조금씩 온다고해서 얼른 병원에 가쟈고 했더니 자기가 병원가면 서너밤을 자야한다고 남은 가족을 위해 뭐를 계속 준비하고 정돈한다고 지체했다. 밤이 늦어서야 출발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밤이라 깜깜하고 아무리 와이퍼를 세게 작동해도 앞이 잘 안보였다. 비치로드를 달렸는데 차가 바다로 빠질까 겁이났다. 애기가 나온다고해서 당황이되어 운전을 겨우해서 병원에 도착했는데 emergency 쪽으로 가는 길을 못찿아 병원 아래쪽에 대었더니 계단을 올라가야했다. 무거운 집사람을 안고 한밤중에 그 계단을 올라가려니 식은땀이 났다. 마침 덩치 좋은 챠몰로인이 나타나 집사람을 번쩍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도 총총 뒤따라 갔다. 그러더니 간호원이 침대를 가져와 밀고 분만실로 데려갔다. 그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기가 나왔다. 첫째.둘째가 태어날때는 병원에 내가 없었다. 미국 여권을 신청해야 한다고 영어 이름을 지어 오라해서 Emanuel 로 했다. 이제 그동안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생각에서 그 이름을 택했다.
효석이도 분만실까지 들어가보고 출생신고서도 뗏다. 효석이는 감회가 새로운지 우리 사진을 많이 찍어줬다. 점심때는 서명동선교사님 부부와 식사를 하고 그분들이 사역하시는 코부라볼에 있는 Ever Green Church 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Susupe 에 있는 옛날 살던 아파트를 방문하니 그 건물, 그방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살던 Navy Hill 에 있는 아파트를 찿아가니 그 건물도 그대로였고 그 주인도 만날수 있었다. 그때 나는 사업도 실패하고 일거리도 없고해서 아파트의 아이들과 자주 놀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장희.승희.서준.윤석.동석.효석. 
애들이 우리방에 와서 침대에서 점프를 하며 자주 놀았다. 그러다가 94년 1월 사이판에 8.1 규모의 지진이 왔다. 아파트가 바다의 배처럼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나는 땅이 그렇케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도 아이들이 우리 방에서 놀고있어서 얼른 탁자 밑으로 들어 오라해서 지진이 멈추기를 기도했었다. 지진 3일전 꿈에 100층 높이보다 훨씬 높은 해일이 바다 저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당시 많은 꿈을 꾸었고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앞으로의 나의 사역을 예시하는 꿈들이 많았다. 여하튼 나는 그당시 시간이 많았고 아침에 비치로 나가 혼자 회개하고 묵상하고 저녁에 돌아오고 1년이 넘게 고난의 시간임과 동시에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현장에 다시 갔을때 영성이 새롭게 됨을 느꼈다.

 

효석이가 태어난 Commonwealth Health Center
분만실
Susupe Apartment
Navy Hill Apartment
Navy Hill Apartment
Banzai Cliff
Banzai 위령비

 

 

 

9월 3일
옛날 출석하던 구아로라이에 있는 예손장로교회를 찿아갔다. 그 건물 그대로였다. 그 당시 나는 집사로서 재정을 담당했다. 원주민에게서 땅을 임대해서 지어진 건물이어서 매달 1500불씩 월세를 내야했다. 월세와 목회자 사례비를 맞추기가 매달 힘들었다. 전기세를 제때 못내서 전기가 끊긴적도 자주있었다. 또 연결할려면 연결 비용도 또 내야했다. 성도수는 많지 않았고 그 섬에서는 두번째로 큰 한인 교회였다. 중국인 선교도 담당하고 열심히 모여 기도했다. 이제는 이곳의 경기도 많이 위축되었고 많은 한인이 떠났고 담임목사님도 18년간 사역하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이제는 필리핀인의 교회가 되었다. 주일날 두번 예배를 드리고 화요일 기도모임 그리고 주중 3회 성경공부 장소로 사용되고있다. 감사한 일이었다.
이 교회에서 내 자아가 말씀으로 깨어지고 기도가 응답되어 선교사로 나갈수 있는 곳이었기에 감회가 깊었다. 이곳에서 철저히 회개했고 말씀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고 중국어를 배우면서 선교를 동참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알았고 하나님의 여러 계시를 받았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 어떤것인지 배웠고 선교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배운곳이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후 삼성. 럭키. 대한항공. 코오롱관광 등 여러 직장을 거치고 사이판에서도 여행업.해운.건축.콘도등 여러 경험을 하게하시고 마침내는 한쪽 구석으로 몰고 가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시고 그러면서 천국의 사역쪽으로 문을 열어주시고 그곳에서 기쁨을 알게하시고.. 
긴 인생 여정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수있었다. 여러 일을 해보았지만 만족함이 없었다. 그때 나는 성경을 가르치며 살면 일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이되었다.
교회를 나와 Lau Lau Beach 로 갔다.  가는길은 그때나 변함없는 흙길에 정글이었고 비치는 산호로 가득했고 모래는 거의 없었다. 망망한 대해 남색의 깊은 바다. 작열하는 태양빛. 저멀리 내가 한동안 아끼며 장래를 설계했던 단단 지역에 있는 땅이 보인다. Ocean view 를 가진 절벽위의 넓은 땅이었다. 만약 콘도 사업이 잘되었으면 나는 그것을 관리하며 지금까지 사이판에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기에 일이 잘 풀릴 수가 없었다. 그렇케 실패한 것에 너무 감사한다. 지금 이 선교 사역이 훨씬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 주셨고 그 문을 열어주시고 그 길로 갈것을 종용하셨다. 
라우라우를 나와 장희.승희네 가족을 찿기위해 마마 상점과 코코 식당으로 갔다. 드디어 거기서 그분들과 통화를 할수있었다. 그분들이 우리 땅을 인수하였기에 모든것을 정리하고 94년도에 싱가폴로 신학하러 떠날수 있었다. 사이판 일을 다정리 하고 싱가폴에 도착했을 때는 5천불이 남았었다. 그 돈으로 한학기만을 할수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28년간 비지니스를 하지않고 주의 일만 감당했는데 아이들 교육을 다 시키고 우리도 생활을 잘해올 수 있었다. 장희네 엄마도 내가 한참 망해 가고있을때 내가 목사가되는 꿈을 꾸셨다고했다.
저녁은 나우루 빌딩 8층의 식당에서 서명동 선교사님 내외와 했다. 나우루 섬은 점점 해수면이 차올라 그 나라가 거의 없어질 위기에 있었기에 세계 여러나라에 땅을 사서 이주하고있다. 
식사후 장희.승희네 부모를 28년만에 만나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이 분들은 벽돌을 만들어 팔아서 지금은 여러 건물을 크게 지어 임대를 하고있다. 사이판은 외국인에게 55년간 땅을 임대해 주고있다. 
그 옛 사진속 어린 아이 6명을 한사람씩 생각해 본다. 딸 장희는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아들 승희는 미 육사를 나와 평택에서 소령으로 근무한다고 하셨다. 윤석이는 한국에서 의사로, 동석이는 싱가폴에서 다국적 기업에, 효석이는 미국에서 다큐멘타리 작가로, 아파트 주인 아들인 서준이는 미국 변호사겸  사이판 사업가로, 그당시 사이판 조그마한 섬에서 살던 조그마한 촌 아이들이 이제는 국제적인 도시에서 중요한 일들을 감당하는 성인으로 장성케 하신 섭리 또한 놀라운 일이다. 어릴때 천연의 바다와 언덕, 문명과 많이 동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서, 생각과 꿈을 심어, 이제 점점 그 인생의 나무가 크고 튼튼하게 자라남을 목도한다. 이 또한 이번 여행을 통해 확증한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이다.

 

Ever Green Church 서명동 선교사님.
1994년도 사진. 왼편에서부터. 장희( 뉴욕거주. 디자이너). 동석 (싱가폴거주. 유니레버 근무). 효석 ( LA 거주 documentary photographer). 승희 (미육사 졸업. 평택 한미연합사 소령). 서준 (뉴욕. 변호사. 사이판 거주). 윤석 ( 부산. 의사)

 

예손장로교회
장희.승희네 부모님과
비치로드에 있는 장희.승희네 건물.

 

 

 

 

9월 4일.
이제 사이판을 떠나는 날이다. 아침에 장희.승희네와 아침식사를 하며 못다한 이야기를 마져 했다. 현지인이 많이 오는 식당에서 현지식을 풍성히 먹었다. 
주일이라 이 장로님 ( Navy Hill 아파트 주인)이 가르치시는 성경공부반에 참석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pizza restaurant 에서 아침을 제공하면서 챠모로와 필리핀인 성도들 30여명에게 주일마다 성경을 10년째 가르쳐 오신다고 했다. 한국에서 연세대를 졸업하시고 사이판에서 사업을 하시면서 또 미국에 가서 한의학 박사학위도 따고 신학도 하셨다고한다. 사이판에는 30여년 사셨고 사업도 성공적으로 하셨고 자비량 선교사님 이셨다. 참 좋은 선교 model을 보게 되어 기뻣다.
11시에는 서명동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Ever Green Church 예배에서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10 처녀를 설교했다. 오늘날 어떻게 기름을 준비할것인가 의 주제로 회개와 그에따른 성령충만의 삶. 이것이 말세에 가장 확실한 기름이요  안전한 피난처림을 설명하고 또한 나의 간증을 같이 이야기하고 예배후 중국인 전도사님. 성도들과 인사하고 Subway 에서 점심 대접을 받고 차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와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한참오니 왼쪽으로 태풍 힌남노가 지나가는 것을 보라고 기장이 방송을 한다. 인천에 내려 맡겨놓은 짐을 찿아 홍대 부근에 숙소를 잡았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어서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과거를 답사할 수 있었고 그리운 사람들도 만났고 vision을 새롭게 하고 효석이도 자신의 출생지에 대한 확실한 감을 잡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이장로님 피자 레스토랑에서 주일 성경공부
Ever Green Church 예배.
Subway 점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