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때 태권도 교관으로 월남으로갔다가 1973년 캄보디아 장군의 초청으로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중 어머니의 기도덕분에 개심을 하게되고 그 후 고아들 수십 명을 본인 집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며 돌보다가 1975년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 입성하게되자 난리통에 고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본인도 태국국경으로 가서 그들을 찿으려 노력하다 캄보디아 난민들의 처참한 생활을보고 미국, 일본등에 도움을 요청하여 구호품으로 그들을 돕고 캄보디아 국경안에까지 들어가 난민을 도움. 난민촌에 교회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사진들과 그의 활동을 다룬 신문기사 (영자. 일어판)을 1997년 캄보디아에 들어가 그의 집에서 지낼때 보았음.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생활하다(미국 국적자임) 중국에서도 생활하고 1994년경 다시 캄보디아로 들어와 사업을 하다가 1997년 6월 캄보디아에 내전이 터졌을때 포첸통공항에서 한국인 신학생 3명(싱가폴 FEBC 신학교) 을 만나게 되고 정세가 불안하니 호텔에가지말고 자기집으로 가자고해서 그곳에 머물다 그 신학생들이 싱가폴로 피신을 나오라고 권해서 지미림 가족이 FEBC 기숙사로와서 당분간 지나면서 싱가폴 Life B-P 교회에서 간증을 하게되고 그로 인해 그 교회가 뜨거운 선교의 불이 붙게되고 3명의 FEBC 한국학생을 파송하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남. 교인수가 1500명의 큰 교회이고 해외 선교도 많이하고 선교사들도 돕고있었지만 파송 선교사는 없었는데 한번에 외국인 세명을 파송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하였음. 그리하여 1997년 8월말에 먼저 두 명이 프놈펜 그분의 선교관에서 지내며 프놈펜 상황을 익히며 한인교회(서병도선교사)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현지인 교회도 방문하게됨. 그때에 베트남에서 프놈펜으로 착륙하려던 프로펠라비행기가 돌풍으로 추락하면서 선교사를 비롯한 한인들이 희생되는 사고가있었는데 한인이 있으면 급히 깔멜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받고 가서 하얀천에 쌓인 시신들을보고 처참한 심경이었고 열악한 환경속에 생활이나 선교가 쉽지않겠구나 생각을 함.
어디를 다닐때는 지미 림 선교사가 보디 가드들을 고용해서 장거리를 다니고했음. 아직 내전중이었으므로 밤마다 총소리가 들렸고 그럴때면 앉아있지말고 방바닦에 엎드리라고 교육을 받았고 그곳도 길가 도로변이었는데도 침수가 심해 들어가는데 힘들었고 나는 그곳에 한 달있었는데 지미 림선교사가 내가 중국말을 좀하니 캄퐁솜에 내려가서 사역을하라고해서 캄퐁솜으로 내려와 게스트 하우스 방하나를 얻어 사역을 시작함. 그러다가 2000년 1월 빠일른사역을 시작해야한다고해서 같이 봉고차 2대로 쉬지않고 달려 20시간걸려 도착함. 그때 지미 림선교사는 중풍으로 한쪽팔 한쪽다리를 못쓰던 때였는데도 그몸으로 밴을 운전하며갔음. 밤에 총을든 강도가 차량을 탈취하는 일이있어 보통 운전자들이 가기를 꺼렸고 도로와 다리는 다 망가져 자빠진 차량들이 수시로 나타나고 우리 차도 몇번을 수리하면서 주행을했음. 빠일른에 도착하니 부서진 탱크도있고 정부군복으로 갈아입은 크메르 루즈들이 탱크가 줄지어 놓여있는곳에서 배구를하고 있었고 우리는 크메르 루즈군이 지금도있느냐고 물어보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제일.제이 거버너(시장)은 크메르 루즈출신이었고 제삼 시장은 프놈펜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다. 제삼 시장이 우리를 초청했는데 빠일른 아이들에게 학교교육을 좀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빠일른사역이 시작되었고 지미 림과 우리 KBS는 자주 그곳을 방문하게되었다.
이후 지미 림선교사는 당뇨가 악화되어 거처를 태국 방콕으로 옮겨 그곳에서 빠일른을 오갔는데 빠일른에 1997년경 설립된 사마리탄교회를 도왔고 KBS는 1997년 5월경 KBS출신 부부를 그곳에 파송해서 Pailin B-P 교회를 설립했다. 지미 림선교사가 방콕으로 간 이후로는 일 년에 한번 정도 어떨 때는 2년에 한번정도 만났다. 당뇨가 심해 발가락을 절단했다며 발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후원자들은 그런 몸으로 선교를 한다는것은 무모하다며 미국에와서 치료받을 것을 권했으나 한동안 가지않았다. 그러다 나도 한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못했고 2009년 미국 LA에 갔을때 어떤분이 그분이 2009년 LA에서 돌아가셨다고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은 문을 여는 은사는 있으나 그 이후는 별 열매가 없다고 고백했다. 어떤 위험이 있어도 자신은 무섭지 않다고했다. 월남전에서도 캄보디아 국경 정글 속에서도 돌파하는 힘이있다고했다. 그는 한인 3명의 선교사를 캄보디아로 불러들인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사람이 그를 통하여 캄보디아로왔다. 빠일른의 문을 연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2021년 2월 결혼식차 빠일른을 방문했을때 1997년때부터있던 사마리탄 교회 목사를만났다. 그의 생각이 확 떠올랐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고 그의 용맹도 빠일른 시내에 감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빠일른과 같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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