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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KBS (Kompongsom Bible S.)

KBS (Kompongsom Bible School)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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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Motto

1997년 8월 캄보디아에 도착해서 프놈펜에서 한달있다 캄퐁솜에 내려와 현지교회를 6개월간 도우면서 신학교육이 시급함을 깨닿고 이듬해인 1998년 1월 12일 임대한 집에서 7명의 학생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 당시는 내전이 진행중이어서 모든 것이 어수선하고 학교도 체계도 없었고 배우는 것도 허술하였다. 나도 시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학생들 뿐만아니라 교사들도 와서 교실 한가득 100명 정도가 배울려는 열기로 가득찼다. 프랑스 식민지 시기 동안에 불어가 필수 과목이었기에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1997년, 6개월간 섬긴 캄퐁솜 현지교회

 

거리의 간판도 불어로 되어있고 중학교때부터 불어를 배워서 인텔리들은 불어를 유창히했다. 그러다가 97년도 부터인가 불어 대신 영어를 제일 외국어로 바꾸다보니 영어선생이 거의 없어 다른 과목 교사중에서 차출을 하여 3개월 내지 6개월 집중교육을 통하여 영어교사를 배출하였으니 영어문법을 거의 모르고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영어선생도 영어사전에만 의지해서 선생도 없이 혼자서 영어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어식으로 단어 끝부분은 거의 발음하지 않아 말을 알아들을수 없었는데 더욱 심각한것은 그 발음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니 캄보디아 영어가 끝부분을 발음하지 않는 끔직한 상황에 이르게되었다. 예를 들면 하우스(집) 를 하우,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 또 시험 예상 문제지를 따로 돈을 내야 살수있고 9학년 12학년을 마치면 졸업고사를 합격해야 그 학력이 인정되는데 시험을 못쳐도 돈을 갖다주면 합격시켜주는 일이 당연시 되어서 공부 잘해도 졸업고사에 떨어져 대학을 진학못하는 억울한 일이많아 총기로 선생을 쏘는 일까지 벌어지는 상황이니 학생들이 공부할 의욕이 나질 않았고 선생들도 월급을 20불 받았으니 투잡. 쓰리잡 하다보니 한번 공휴일이 되면 보름씩 한달씩 학교에 오지않는 일도 허다했다. 우리  자녀들도 깡화 중국학교에 보냈는데 캄보디아 선생이 중국어과목을 가르쳤고 교과서는 내용이 1950년대의 것으로 지금은 거의 쓰지않는 내용들이고  물론 간자체도 아니었다. 하루에 3시간정도 수업에 선생이없을 때도있고 공휴일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외국인이 영어로 성경을 가르친다하니 젊은이들에겐 큰 기회였다. 비록 내전 중 이었지만 이제 영어를 배워야 모토돕 운전자도 외국인을 태울 수 있고 시장에서도 물건을 잘 팔수있으니 부모들도 적극 가서 배우라고 권장했다. 신학생은 7명이었지만 집사람이 하는 영어반은 이 삼십명이됐다. 신학생들은 거의 성경을 처음대해봤고 영어수준은 간단한 단어를 읽을줄아는 수준이었다. 나는 원래 중국에 가기위해 3년동안 영어로 신학하면서 중국어를 왠만큼할 수준으로 두뇌에 저장해놓았는데 새로운 크메르를 또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나이도 젊지않고 두뇌도 한계가있었다. 그리고 발음을 하면 틀렸다고 하고 10번 발음해도 다 틀렸다고해서 한 일년 노력하다 포기하고 영어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들이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계속 영어로 성경을 한장씩 읽고 어려운 부분은 설명하고 해서 3장 정도 공부하고 다음날엔 꼭 시험을쳤다 (True or False, 25문제정도). 캄보디아성경이 있으니 뜻은 알수있으니 시험을 칠려면 두 성경을 같이 읽어야했다. 신입생들은 한 일년 정도는 문제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다가 2년 정도하면 성적이 오르고 3년 지나면 성경 한권을 다 배우고 테스트를 다 치르게되고 3년과정이지만 4년이되면 졸업하고 영어성경을 이해하고 통역도 가능하게된다. 학력이 낮은데 비해 빨리 영어를 습득하는 이유가 불어라는 영어와 비슷한 단어에 익숙해있고, 문장구조가 영어와 거의같고, 틀려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 말하는데 있었다. 다음날 테스트를 받기위해서는 캄.성경, 영어성경을 매일 3장씩 읽어야했다. 나도 매일 트루.폴스문제를 이.삼십개씩 만들어나갔다.

 

이렇게 교육받아서 과연 졸업하고 나가서 사역을 감당할수있을까 의문이 들때도 많았다. 어떤때는 공부 제일못하는 학생이 제일 점수를 많이받을 때는 참 난감했다. 컨닝했다고 의심할수도 없는것이 그의 점수가 제일 높으니.. 어떻케 된거냐고 물으니 성령이 답을 가르쳐 줬다고해서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트루.폴스 방법이 지니는 약점이었다. 잘 찍어서 점수가 잘 나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부한대로 점수가 나왔다. 영어로 수업하다보니 영어권에서 교사가 자발적으로와서 가르쳐주고 팀을 데리고 와서 활동하다보니 학생들의 영어가 빨리늘었다. 사역지에 나가서도 대학을 야간으로 다니며 실력을 늘이고 외국인들과 동역하면서 유창하게되었다. 매일 그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성경을 공부할려니 학생들도 죽을 맛이었다. 나도 영어가 짧은데 설명도 시원치 않았을 테고 영어 흠정역. 그 고어체 성경을 공부할려니 더 고생이었다.

 

 

 

7명의 학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줄기 시작하더니 2명까지 내려갔다. 나에게 위기가 왔다. 만약 한 명만 남는다면 한명두고 어떻게 가르치지? 그 한명마져 안 나오면 신학교로 가는길은 사라지고 내가 받은 비젼은 잘못된 것인가? 하는 갈등의 기간이 몇달 계속됐다. 그러더니 다시 학생수가 늘어나고 1999년에는 더 큰 집을 세얻어 학생이 25명정도가 되었다가 2000년도에 신학교부지를 구입하고 건축은 한참 후에 할 생각을했다. 그  당시로는  그땅이 시내 변두리였고 진입로가 차가 들어가기가 힘들었고 전기. 수도도 없고 바로 옆엔 공동묘지고 죽은 동물이나 시체도 갖다버리고 귀신도 출몰하고 코브라가 많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사자마자 공한 지세가 공표돼어 아무것도 안하는 큰땅은 세금이 많이 나온다고해서 뭐라도 시작할려고 학생 한명을 초가를지어 그곳에 상주시키고 방을 하나씩지어 2002년에 기숙사가 완공되어 학생들이 입주했다. 발전기를 돌려 밤 몇시간만 전기를 공급하고 우물을 파고 또 계속 팠다. 물이 나빠 계속팠다. 60m 이상 깊은 우물을 파도 안좋고 70m 120m 파도 안좋은 물만 나왔다. 샘이 하나 발견되어 10년간은 깨끗한 물을 썼는데 위에 누가 땅을 개발하면서 물이 말라버렸다.촤대한 빗물을 저장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건기가 심할 땐 멀리 가서 빨래하곤 했다. 진입로는 우기만 돼면 산비탈에서 흘러내리는 큰물로 부서져 학교에서 돌을 날라다 매꾸었다. 코부라를 비롯해 각종 뱀들을 수시로 잡았지만 워낙 암반이 많아 그것들의 은신처를 없애기위해 바위에 구멍을내고 폭약을넣어 근 100회가량 폭파하고 그 것을 해머와 정으로 부수었다. 동네 청년들은 막 이사온 신학생들에게 수시로 싸움을 걸었다. 술 마시고와서 흉기로 위협했다. 그래서 방마다 곡갱이등 방어용품을 두고 대비했다. 한마디로 신학교가 전투장이었다. 전기와의 전쟁. 물과위 전쟁. 뱀과의 전쟁. 이웃불량배와 전쟁. 학생내부의 갈등. 또 어떤 땐 귀신도 보았다고하고. . 한편으론 공부하고 한편으로 역경을 이겨내야만 하는 하루 하루가 긴장되는 시간이요 무슨 돌발상황은 수시로 발생했다.

 

우리 선교사들은 한참 뒤에나 그곳으로 옮겼다. 나도 그곳을 모토돕으로 다녔는데 길이 우기땐 진흙이 종아리까지 차고 또 길이 파여 한번은 넘어져야 학교에 갈수있었다. 어떤 싱가폴인 여교사는 하루하루 모토돕으로 가는것이 순교하는 기분이라했다. 학교에서 나올땐 큰길까지 걸어나와야 했기에 꼭 막대기를 들고 가면서 갑자기 나타나는 뱀이나 개들을 쫒았다. 또 외국인이기에 그 당시엔 하이재킹(인질)당하는 상황도 예상하고 대비해야했다. 나도 학교 한번 같다오고나면 안도의 숨이나오고 또 마음이 심란하고 손볼것은 많은데, 필요한것도 많고.. 그래도 일은 빨리 진행되지 않았고 그러다가 한참후에 하나씩 해결이되었다. 기숙사를 산으로 옮길때 30여명이었는데 일년이 지나 학생수는 60명이 넘었고 계속해서 오겠다는 학생이 많아 몇년후에는 근 100명에 육박했다. 어떤 달엔 쌀을 1.5톤을 먹은 적도있다. 그땐 밥을 다들 수북히 가져가 먹었다. 그래도 쌀값이 싸니 버텨냈다. 언젠간 쌀값파동이 있고나서 한번에 쌀 5톤을 비축해 놓은적도있었다. 일찍부터 신학생중에 성적이 좋은자를 싱가폴 FEBC 신학교로보내고 2002년 4명이 졸업하고 돌아왔다.

 

죤 사라이는 KBS에서  한 이.삼년간가르치고 교회를 개척했고 폴 속하는 싱가폴 모리아 b-p 교회후원으로 바탐방으로 파송했다. 이 두 사람은 내가 캄퐁솜에와서 현지교회를 도울때 청년부 예배를 신설했는데 이 두 명의 고삼 학생이 출석했다. 이후에도 몇명이 더 싱가폴에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외국인선교사나 단체와 동역하였고 최초의 신학생이었던 파닛은 2000년 결혼과 동시에 졸업을 하지 않은채로 갑자기 열린 빠일른사역으로 파송하였고 2001년 제 1회 졸업생인 느헤미야 뽄록과 보파. 2명이 졸업하고 그해 느헤미야를 꼬꽁으로 파송했다. 지금까지 170 명정도의 학생이 졸업하고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교회를 개척하였고 여러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다.

 

이 오쁘람 성경학교 산에와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면서 배우고 일하고, 특히 바위를 깨서  뱀의 은신처를 없애고 수많은 돌들을 도로보수. 돌담쌓기. 건축기초. 내부도로 건설 등으로 날라야했다. 없는 길을 만들고 파인 길에 돌을 채워넣고 많은 돌벽들 이런것들을 보면서 돌은 변하지 않고 한결같고 부서지지않고 왜 그리스도를 반석이라 했는지 실감한다. 그 땡볓에 그 무거운 돌을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1000개는 날라야 졸업할 때가된다. 나도 같이 날랐다. 나는 졸업도 못하고 20년을 날랐으니.. 그래도 나는 돌 나를 때가 힘들지만 기분이 좋다. 그 뜨끈 뜨끈한 돌의 열기를 손이나 어깨로 느끼면서 온 근육이 힘을다해 집중해서 돌과같이 한걸음 한걸음 이동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 돌을 던지고나면  온몸이 안식을 체험한다. 이것은 노동이면서 사역이다. 이네들이 KBS에 와서 배우고 돌을 나르면서 체득한 귀중한 교훈을 이제는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땡볓에서나 폭우속에서도 마을 구석구석 날라 그리스도의 왕국이 오기를 바란다.

 

KBS 의 motto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위대한 캄보디아 건설'이다.

 

 

 KBS 졸업식 (2017)
KBS 졸업식 (2014)
KBS 졸업식(2014)